장르
작품 소개
#수한정다정공 #연기수 <strong>“……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strong> 나는 다섯 번 죽었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첩의 자식이라서. 오메가 주제에 너무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되어서. 그리고 너무 쉽게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약해서. 여섯 번째 삶. 목표는 단 하나였다. 살아남기. 그러기 위해서는 튼튼한 방패가 필요했다. 돈 많고, 권력 있고, 좀 무섭지만 아무튼 안전한 우성 알파 차무진. 전생에 내 약혼자였고, 내 죽음 앞에서도 끝내 무심했지만…. 이번 생엔 저 남자를 이용하기로 했다. 나는 기억을 잃은 척, 가난한 척, 갈 곳 없는 척하며 그의 품에 쏙 들어갔다. 계획은 완벽했다. 불쌍한 척해서 보호받고, 순진한 척해서 의심을 피하고, 틈틈이 이복 형제들의 뒤통수도 치고, 적당한 때가 되면 깔끔하게 독립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strong>“나한테서 도망치려면 적어도 내가 질릴 때까지 기다려야지.”</strong>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안전한 우성 알파를 고른 게 아니었다. 절륜하고, 집요하고, 수 틀리면 사람 하나 조용히 묻을 수 있는 남자에게 내 손으로 목줄을 쥐여 준 거였다. 그리고 이 미친 알파는 아무래도 나를 평생 보호할 생각인 것 같다. [미리보기] “깨어났군.” 차무진이 먼저 움직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흔들었다. 하준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차무진이 가까워질수록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우성 알파 특유의 압박감이 있었다. 아직 페로몬을 제대로 풀지 않았는데도 존재감만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가 자신의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하준은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몸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다섯 번의 삶이 남긴 습관이었다. 스스로 보호할 힘이 전혀 없는 오메가가 낯선 알파의 행동이 친절인지 위협인지 판단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곧 이마에 차가운 손바닥이 닿았다. “…….” 하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식장에서 한 번 잡아 봤던 차무진의 손은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뼈마디가 굵고 단단했지만, 강제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열을 재듯 이마에 잠시 머무를 뿐이었다. 차무진은 이어 손등을 하준의 목덜미 옆으로 가져갔다. 하준은 숨을 멈췄다. 하지만 손길은 정중했다. “아직 열이 있어.” 하준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눈을 떴다. 차무진이 코앞에 있었다. 새까만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빛이 닿아 동공이 가늘어져도 그렇게 가볍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하준은 차무진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약혼식 날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도 마치 좋은 그림의 구도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빛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는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침대로 돌아가.” 명령조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하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이 말랐고, 힘이 없었다. 차무진의 시선이 책상 위로 향했다. 현금과 서류, 그리고 USB로 향하는 자신의 눈빛을 읽었는지 그가 말했다. “중요한 건가?” 하준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말을 내뱉지 않고 가까스로 삼켰다. 바로 말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지금 자신은 기억을 잃은 척해야 했고, 갈 곳 없는 척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충격으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척해야 했다. 말을 못 한다는 건 생각보다 쓸 만한 방패다. 사람은 입을 다문 상대에게 제멋대로 사연을 붙이기 마련이다. 무서웠겠지, 충격이 컸겠지,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말도 못 할까…… 하준은 그 동정과 불쾌한 상상을 이용하기로 했다. 씨발, 간택 한번 당하기 더럽게 어렵네. 하준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젖은 속눈썹이 눈가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일부러 입술을 조금 떨었다. 말하려고 애쓰는 척, 그러나 끝내 소리가 나오지 않는 척. 그리고 차무진의 침묵과 무거운 시선이 길어질 즈음이 되어서, 하준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냥 울었냐고? 아니, 씨발 존나 없어 보이게 울었다. 이 새끼가 부잣집 도련님이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그러니까 방금 막 초가집이 무너진 소작농처럼 울었다.
출처: 리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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